신앙은 신앙, 돈은 돈!
신앙은 신앙, 돈은 돈!
구약시대, 하나님의 경쟁자는 바알이었습니다.
바알한테 하나님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알을 그렇게 높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욕심이 바알한테 투영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바알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전부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화폐경제시대가 아니었는데 신약시대는 화폐경제시대로 바뀝니다.
구약시대에는 바알을 통해서 자기 욕심을 섬기다가 화폐경제가 발달한 다음에는 돈을 통해서 자기 욕심을 섬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누려야 할 사물’과 ‘사용해야 할 사물’로 나누어서 얘기했습니다.
누려야 할 사물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진정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해당되고 사람 또한 그렇습니다.
사용해야 할 사물은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아닌 모든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돈입니다.
셰익스피어가 한 얘기가 있습니다.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면 자식은 모른 체 하지만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모두 효자가 된다.”
십계명 중의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것보다 돈주머니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성경 말씀은 별 힘이 없지만 돈에는 실질적인 힘이 있습니다.
돈에 힘이 있으면 그 돈은 사람의 가치도 결정할 것입니다.
조지 오웰이 쓴 <엽란의 비상>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고든 콤스톡’이 사랑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을 빗대어 인용한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고 할지라도
돈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할 수 있어 온갖 신비를 훤하게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그런즉 믿음과 소망과 돈,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돈이라.”
이 얘기가 농담일까요, 진담일까요?
아무래도 농담 형식을 빌린 진담 같아서 씁쓸합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식한테 재산을 너무 일찍 물려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한테 부모 대접 제대로 받으려면 끝까지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돈으로 부모 대접 받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얘기를 아무도 안 합니다.
제가 그 얘기를 어디서 들었겠을까요?
양로원에서 들었으면 별 문제가 아닙니다.
부교역자 시절에 구역예배 인도한 다음에 교인들끼리 차 마시며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생을 교회에서 보냈다는 나이 많은 권사가 얘기를 하니 다른 사람들은 전부 맞장구를 칩니다.
그 얘기가 얼마나 불신앙적인 얘기인지 전혀 모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적은 없습니다.
바알을 같이 섬겼을 뿐입니다.
바알은 바알이고 여호와는 여호와인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같은 얘기입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돈은 돈입니다.
예배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예배를 드린 다음에는 세상에서는 돈이 최고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순인 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해서 망했고 세상이 그렇게 하다가 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쉽게 보는 어려운 요한계시록 슈퍼플러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