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야베스의 기도는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야베스의 기도, 다시 쓰는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의 기도 그 후, 어린이를 위한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 기도의 숨겨진 진실, 야베스의 영성” 등 여러권의 책으로 나와 기도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브루스 윌킨슨이 지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우리를 환난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기보다는 “이렇게 기도 하면 된다”라는 기도 만능주의로 변질되어 자기의 야망과 유익을 구하는 기도쪽에 큰 무게를 두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 없는 여러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문 가운데 믿는 자들이 해야 할 가장 큰 기도는 주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예배가 끝날 때 하는 형식적인 기도문이 된 지 오래 되었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이 되는 야베스의 기도 등이 우리의 기도문이 된다면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여호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해서 복을 받게 되었는지 역사적인 면과 원어 성경을 대조하여 해석해 보고자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대상 4:9)
새로 번역되어 나온 성경은 “귀중한 자”로 나오지만, 그 전의 성경은 “존귀한 자”로 나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존귀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셨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라는 뜻은 ‘슬픔’이란 뜻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고통 중에 낳았기 때문입니다. 한글성경으로 번역된 ‘수고로이’는 원어적 의미로 ‘고통, 또는 우상’이란 뜻입니다.
또 여기서 ‘존귀한 자, 귀중한 자’는 히브리어로 ‘카바드’로 ‘무겁다, 힘겹다, 짐이 되다, 또는 존경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앞뒤 문맥에 따라 존귀한 자, 또는 무거운 자가 됩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야베스가 존귀한 자로 태어났다면 슬픔, 또는 고통이란 말이 아니라, 기쁨 또는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야베스의 뜻은 ‘슬픔’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는 ‘존귀한 자, 또는 귀중한 자’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진 자’라고 해야 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에서, "귀중한 자”는 문법적으로 수동분사형태로 야베스는 모든 형제들보다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입니다. 그 짐이 없어질 때 비로소 영화롭고, 영광된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는 자신의 존재, 즉 인생이 모든 형제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에 그 짐을 벗어 형제들과 같이 되고자 그렇게 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을 빼고 우리가 처한 환경을 놓고 기도합니다. 세상의 복을 따불로 달라고 기도합니다. 설령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고 해도 야베스가 하는 기도와 무관한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우리의 현실이 되고자 하면 우선 우리가 우상 가운데 태어난 것임을 자각하고 슬픔에 싸여서 그 슬픔을 맛보고 자신이 지고 있는 짐들이 얼마나 큰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란 우상 가운데서 사는 이들에게 “수고하고 무것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짐이 무엇인지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야베스가 가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
위의 ‘복을 주시려거든’에서 원문성경은 ‘주시거든’이란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번역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왕 주실 것이면 더 좋은 것으로 달라고 하는 욕심의 기도가 되기 싶습니다. 원문을 보면 “주께서 나에게 참으로 복일지라도, 또는 주께서 복의 복일지라도” 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야베스는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복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한 후에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손으로 도와 달라고 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도와 달라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원뜻은 ‘주의 손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입니다.
더나아가 ‘나로 환난에서 벗어나’ 이 환난이 마치 야베스가 처해 있는 환경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환난”이 아니라 “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악으로 계속 지어져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즉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사 만들어져 가고 있는 이 악으로부터 나의 슬픔이 없게 하소서’라고 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야베스에게 들어온 악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노아 때 세상은 악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악입니다. 세상 신이 그를 지배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죄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있을 때는 늘 괴로움이 있습니다. 자신은 분명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날마다 고통의 짐 때문에 한숨만 쉬고 있는 것입니다.
땅이 있을지라도 그 땅에는 농사를 지어도 온전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안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우상으로 섬겼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셔서 내가 지고 있는 모든 짐을 벗어 던지고 이제 다른 형제들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땅을 넓혀 생명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농부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주기도문에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해 주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기도문의 삶, 즉 마음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그 생명을 가꾸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세상 것에 시험이 들어 슬픔과 고통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는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지 않아 슬픔이 짓누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베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자로부터 자신을 건져 달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다른 형제들처럼 존귀한 자가 되어 자기의 지경을 넓혀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의 고통 중에 낳아진 상태이므로 자신 또한 악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악으로부터 벗어나 존귀한 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존귀한 자가 되는 복을 얻게 된 것이 야베스의 기도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왕 아래에서 종살이 하면서 애굽 왕이 시키는 일 때문에 그 고통을 어디다 하소연 할 데가 없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과 같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 힘든 애굽의 종살이로 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따라서 전에는 슬픔이었지만 이제는 영광이 되어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편할 때는 자신의 신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짐이 점점 무거움을 알고서야 자신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근원을 따라가다 보니,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자신들이 여호와의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야 할 그들이 죄의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이렇게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자신의 실존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음에서 살아나 새로운 생명의 몸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야베스는 모든 형제보다 무거운 짐을 진 자입니다. 같은 형제이면서 형제들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항상 외톨이었습니다. 이렇듯 “너희가 아들인고로” 할 때 아들의 영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기 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나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이면 아들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만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야베스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거듭난 야베스가 되기 위해 야베스의 기도가 우리에게 현실화 되는 복이 임해야 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에서, 지역이란 말의 원뜻은 “경계”라는 뜻입니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선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는 열두 경계가 있어 그 경계 안에서 삶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자신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자신의 경계 즉 자신의 소유가 없는 사람은 종이나 다름없습니다. 야베스가 모든 형제들보다 슬픈 자였던 것은 자신의 악 때문에, 즉 하나님과 떨어져 살았기에 종과 같은 신분이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토를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자신의 지역이 없는 종살이 같은 삶은 늘 고달프고 사는 자체가 힘겹습니다. 야베스는 이제 아들이 되어 아버지가 주시는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의 지경은 이스라엘의 유대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자들의 마음의 땅에 생명의 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땅의 경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경계를 분명히 정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생명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야베스에게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경계가 있는 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거운 짐을 벗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영성의 눈으로 바라보면 오늘 우리도 지경을 받아야 합니다. 이 지경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만 한정 짓고 기도한다면 그는 이미 하늘의 상급을 받았기에 살아계신 아버지로부터 분깃이 없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교회의 직분에 상관없이 받아야할 지경이 바로 하나님의 밭입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8)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보고 밭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지경이고 경계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변화가 되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그 나라가 바로 성도이며 마음의 밭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의 밭에 생명의 씨를 뿌려서 그 씨로 인해 땅이 정복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복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있는 가시덩굴을 걷어내고 옥토가 되어 생명의 씨를 받아 생명의 싹을 내는 밭이 되는 복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땅덩이를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옥토가 되게 해 달라고, 또 생명의 씨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야베스입니다. 무거움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알고 지고 가면서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마음의 땅에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해야 합니다. 시험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악한 자로부터 보호해서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어 서로 사랑으로 승화되는 신앙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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