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의 바리새인은 누구인가?
글쓴이/봉민근 교회처럼 말이 많은 공동체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매우 귀중하고 존귀한 삶이다. 그러나 말 하나에 토를 달며 신학적으로 어떻고 뭐가 어떻니 하면서 좀 처럼 이해 하려 하지 않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완벽한 것은 좋지만 본질을 외면하고 교회에 논쟁거리를 만드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용어 한마디 때문에 교회가 시끄럽고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다.
본질이신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조금도 이해하여 들으려는 배려가 없이 조금만 실수 하여도 정죄 하기에 빠른 우리의 자화상은 오히려 세상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중보기도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논쟁들이다. 본질적인 기도에 집중핮 못하고 찬양대가 옳으니 성가대가 틀리니 하면서 정작 본질인 찬양에는 마음을 모두지 못 한다면 자칫 외식주의로 흐르기가 쉽다. 그런식의 논쟁이라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용서하신 주님의 태도에도 문제를 삼아야 하는가? 저것은 천주교에서 온 것이니 배척해야 하고 이것은 누가 말한 것이니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식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하는 이의 의도를 헤아려 듣는 태도가 없다면 바리새적인 신앙이라 말 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이해심의 부족은 한국교회의 분열을 가져 왔고 오늘날 누더기 같은 수백개의 교단을 형성하여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기현상을 만들었다. 안식일에 밀을 먹은 제자들을 힐난하는 이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지식만 쌓고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이 결여된 결과라 할수 있다. 나만 옳고 나만이 정통이라는 오만에서 벗어나 본질에 충실해야 옳다고 본다. 성경은 잘 알지 모르나 이해심도 사랑의 마음도 없는 신학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인은 자칫 외식적으로 흐르기 쉽다. 형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죄 하기에만 빠른 신앙은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이요 지식이 낳은 교만과 자만의 바벨탑적 극치라 할 것이다. 이런이들의 삶에 어찌 용서가 자리 잡을 틈이 있겠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 말 하겠는가? 조금 몰라도 되고 실수해도 된다. 거기에 사랑하고 용서하며 용납하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기도의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 진리와 타협 하거나 아닌 것을 그렇다고 인정해 주라는 것이 아니다. 이해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황금률의 정신이요 용서와 이해의 모범이신 주님의 정신인 것이다.☆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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