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역사
뉴질랜드는 서기 950년 경(고려시대 광종 즈음), 하와이키(Hawaiki-지금의 Tahiti섬 근처로 추정)에서 출발한 쿠페(Kupe)와 그의 부인 그리고 선원들이 카누를 타고 이곳을 처음 발견하기 전 까지는 거대한 공룡새의 일종인 '모아(Moa)'새를 비롯한 '키위(Kiwi)'새 등 천적이 없어서 날을 필요가 없는 생활로 변하면서 육상동물로 진화한 날개 없는 새들과 그 밖의 다양한 종류의 새들의 서식지였다. 원거리 항해 끝에 이 땅을 멀리서 처음 목격한 쿠페의 부인은 긴 구름 밑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이곳으로의 항해는 매우 위험하다고 반대했지만 쿠페는 남쪽편의 어디엔가 분명히 '미지의 땅'이 있을 것이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대한 확신을 굳게 믿고 항해를 계속 한 결과 바로 현재 뉴질랜드 북섬의 호키앙가 (Hokianga)에 닿을 수 있었다.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쿠페는 이곳의 이름을 자신의 부인이 처음 이곳을 목격할 때 말했었던 '길고 흰 구름의….'라고 했던 단어를 떠 올리며 이 땅의 이름을 '아오테아로아 (Aotearoa-길고 흰 구름의 땅)'라고 명명 하였다. 그 후 1150년, 1350년 등 두 번에 걸쳐서 하와이키와 인근지역에 살고있던 폴리네시안 (Polynesian)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유럽인이 처음 이곳으로 탐험을 해왔던 17세기 초 까지 그들은 이곳으로 가지고 온 각종 식물과 씨앗, 개, 쥐 등 과 함께 모아새 등의 수렵과 어패류, 연근해의 수산물 등의 어로 생활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생활을 영위해 왔다.지리상의 발견 이후 강력한 해상권을 휘두르며 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해 오던 스페인과 네덜란드 중 바타비아(Batavia-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파견되어 있던 네덜란드의 아벨 타즈만(Abel Tasman) 총독은 점점 약화되어 가는 네덜란드의 해상권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면서 재임 중 반드시 실현하고 싶었던 계획을 착수 하게 된다. 신화와 전설 속에 구전 되 오던 '미지의 남쪽의 땅(Tera Australis Incognita)'을 향한 탐험 끝에 1642년 12월 13일 남섬의 호키티카(Hokitika) 근방에서 상륙 전 일단 수색조를 편성에 상륙을 시도하다 이 중 4명이 사람의 이빨에 의하여 뜯어 먹힌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 후 원주민 카누 전투단의 해상 공격에 의하여 상륙 조차도 하지 못하고 남섬 북단의 Taitapu(현 Golden Bay)를 거쳐 북섬의 최북단을 돌아 다시 바타비아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땅의 아름다운 풍경을 잊을 수가 없어 네덜란드 자기 고향의 해안도시 마을인 Zedt을 각색하여 'Niew Zedt'로 명명 한 후 'Niew Zeeland' 라는 이름으로 네덜란드 지도에 최초로 표기 되였다가 그 후 영어식으로 변경 된 것이 오늘날 'New Zealand'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지칭하게 되었다.뉴질랜드는 아벨 타즈만에 의하여 최초로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식인종이 사는 섬으로 잘못 소개 되기도 했지만 마오리는 사람을 먹는 식인종이 아니라 부족 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든 부족은 상대방의 영혼까지 쟁취한다는 풍습으로 시신의 일부를 먹는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 후 18세기 중반 부터 영국과 프랑스가 드디어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이미 호주에 터를 마련한 영국의 황실 직속 해군의 '제임스 쿡(James Cook) 엔데버 호(Endeavour) 선장은 태양의 주기를 따라 금성의 이동 경로를 관찰한다는 항해 목적을 앞세워 다시 남쪽으로의 탐험을 시작하지만 그것은 대외적인 명분일 뿐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에서 실제로 존재가 확인 된 'Tera Australis Incognita'에 대한 선점이 주된 이유였다.1769년 10월 6일 드디어 투우랑가누이(Turanganui-현 Gisborne근처)에 상륙한 이 후 본격적인 탐험을 진행하는 중 원주민들에 대한 발포사건을 계기로 적잖은 마찰을 겪게 되지만 이 항해 중 이미 타히티 에서부터 데려온 '투파이아'라는 원주민의 언어와 이들의 언어가 일치함을 알아낸 지혜가 뛰어난 제임스 쿡 선장은 원만한 의사소통에 힘입어 어떤 식으로 든 원주민들과의 친분관계를 정상화 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이곳 원주민들과 접촉 중 원주민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한 영국 탐험대의 질문을 자신들의 신분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잘못 인식 한 한 원주민이 우리는 보통계급(혹은 보통사람) 이라는 뜻의 '마오리(Maori)'로 답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곳 원주민을 '마오리'로 칭하게 되었다. 이 후 1770년, 1773년 두 번의 세밀한 뉴질랜드의 항해 끝에 비교적 정확한 뉴질랜드의 지도가 완성되고 이것이 영국 황실에 전달되면서 영국정부는 프랑스를 경계하기 위하여 이주정책을 선포하였으며 초기에는 주로 물개잡이, 고래잡이, 나무벌목꾼 등이 이 곳을 찾아 왔으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이 되는 19세기 초 이래 마오리들과 이주민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역사의 수순이었다. 이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부족사회의 문화와 급속도로 발달해 온 서구문명이 이끄는 합리주의, 개인주의 간의 문화충돌인 것 이었다.1838년 영국으로부터 파견 된 초대 총독 에드워드 웨이크필드(Edward Wakefield)는 New Zealand Company를 설립하여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토지매수와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찰과 사건,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곳, 저 곳에서의 충돌은 점차 확산되어 국지적 전쟁으로 치달았고 조기수습을 위하여 웨이크필드 후임으로 파견 한 윌리엄 홉슨(William Hobson)은 결국 1840년 2월 6일 마오리 추장 대표단과의 협상을 성공시켜 국제조약화 하였으니 이것이 영국정부와 마오리 간의 사실상 식민지 조약인 '와이탕이 조약(The Treat of Waitangi)'이다.조약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제1조 : 마오리의 모든 주권은 영국에 이양한다. 제2조 : 마오리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 소유를 모두 인정한다. 단 토지 매각과 관련한 사안은 영국정부와만 거래한다.제3조 : 모든 마오리는 영국여왕의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한다.이 문서는 영어와 마오리어로 번역돠어 조인되었으나 제2조에 관한 해석상 많은 문제를 야기시켜 결국 마오리들은 조인에 참석했던 대표단에 대한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곳, 저곳에서 영국 국기를 불태우는 등 그 여파가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영국 정부는 이미 국제법상 효력이 발생한 조약을 재론할 수 없다고 단정, 사회전반에 걸쳐 시위가 끝이지 않다가 결국 1860년부터 1865년 까지 북섬지역에서는 영국군과 마오리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숫자로 훨씬 우세한 마오리군이었지만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북섬의 대부분은 초토화 되었고 '와이탕이 조약'은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계속적인 사회적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북섬이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동안 남섬에서는, 184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1850년대 호주 퀸스랜드에 이어 1860년 노천광이 발견되어 국내인은 물론 해외에서도 많은 Gold Miner들이 모여 들면서 골드러시를 이루었다. 특히 아편을 이용하여 중국을 침략한 영국은 중국인들을 뉴질랜드로 끌어드려 금광 노동자로 참여 시켰고 급여의 일부를 다시 아편으로 지불하면서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삶의 도탄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의 수도는 오클랜드(Auckland)였지만 남섬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남섬에서 너무나 먼 수도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달라는 남섬 경제인들의 요구가 받아 들여져 1865년 급하게 지금의 수도인 '웰링턴(Wellington)'으로 천도하게 되었다.골드러시는 약10년의 반짝 경기로 끝난 후 사회가 점점 안정을 취하면서 뉴질랜드는 진보적인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로 건너와 1869년 한 부유층 남자와 결혼 한 케이트 세퍼드(Kate Sheppard)는 19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적으로 만연했던 여성차별에 관한 관행과 제도를 척결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뉴질랜드 여성 3분의 1의 사인을 얻어낸 탄원서가 국회에 제출되고 결국 한명의 여성 조차 없었던 국회로부터 1893년 세계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게 되었고 1919년에는 여성의 피선거권까지 얻어내어 뉴질랜드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Elizabeth McCombs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20세기로 넘어 오면서도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는 1,2차 세계대전에 전쟁의 직접적인 이해당사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요청에 의하여 인구의 10%라는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전쟁에 파견하게 된다.특히 1차 세계대전에서만 참전한 약 10만면 중 1만7천 여명이 전사하는 가슴 아픈 상처를 안았다.이러한 희생의 대가로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으나 돌아오지 못한 남편과 상의군인이 되어 돌아온 남편, 아들을 대신해 농장의 험한 일들은 여성들이 맡게 된 것이다.우리나라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임기 초에 실시했던 '국토개발5개년계획'과 유사한 정책이 뉴질랜드에서도 있었는데 이는 노동당 집권시 1986년부터 1990년까지의 '대 구조조정'이었다. 국가 소유의 사업들을 외국자본에 매각 혹은 자본 참여 등의 방법으로 조정했고 사회간접자본의 대부분도 외국에 매각 했으며 공무원의 숫자도 심지어 20%로 감축하는 기관도 있었다.이러한 살을 깎는 구조조정은 1990년대 들어서 그 효과가 발생하여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구조조정에 가장 성공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경쟁력이 없는 대,중소기업은 이미 이 당시 정리 됬다고 볼 수 있다.뉴질랜드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근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의 개봉은 미국의 2001년 9.11테러 이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안전한 자연의 뉴질랜드로 불러들였고 진정한 '행복(Happiness)'에 관한 새로운 정의를 갖게 했다. 현재 뉴질랜드는 내각책임제의 사회민주복지 국가로서 국민당의 존 키(John Key)가 2010년에 재임에 성공하여 지금까지 총리를 맡고 있다.
지리적 환경
뉴질랜드는 남위 34도에서 47도에 분포되어 있는 비교적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섬나라이며 그 길이가 약 1500km에 이른다. 그러므로 북섬의 북단과 남섬의 남단은 상당히 상이한 환경과 기후의 차이를 보이므로 이곳을 단순히 서안해양성 기후로 단정해서는 안되며 북섬 북단의 열대성 기후에서부터 남섬 알프스 산맥 고산지의 냉대성 기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분포의 복합 해양성 기후라 할 수 있다.동서의 폭은 약450km이며 호주까지의 거리는 약 2200km 정도 이다. 크기는 약27만 평방km로서 영국, 일본, 필리핀 등과 비슷한 면적이 된다. 북섬의 화산지역과 남섬의 빙하침식 지역이 확실히 대별되며 중생대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신생대 초기에 오늘날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 시기에 두 번이나 바다 밑으로 잠겨있던 동안에 전 세계의 포유류들의 이동이 완료 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 살았던 포유류는 박쥐 두 종류 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포유류는 마오리 원주민서부터 유럽인에 이르기 까지 모두 외부에서 들여온 동물이다. 오늘날 남섬의 산악지역에 서 서식 하는 포유류는 토끼, Possum(Stoat) 밖에는 없다. 간혹 멧돼지나 사슴, 산양이 나타나는 지역은 목장의 울타리를 벗어나 야생화 된 것이다.그러므로 국토면적의 63%가 목축장으로서 모두 방목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양, 소, 말, 알파카, 사슴 등을 공격 할 수 있는 맹수가 없기 때문이다.약75%가 해발 200m이상의 산악으로 되어있는 남섬은 거의 민둥산이다. 뉴질랜드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약2700만년 전으로서 이는 풍화, 침식작용 등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유년기의 땅이며 아직도 표토층이 얇은 암반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악지역은 표토층이 더 얇기 때문에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없어서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 인 것이다. 식물의 분포도 아주 단순하며 대부분의 고산지역의 민둥산은 나무대신 다양한 종류의 허브와 관목수(찔레꽃 등등..) 몇 종류만이 자라고 있다.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가시종류의 꽃이 주종을 이룬다.서던 알프스 산맥에는 아직도 기후와 지형의 영향으로 약180개의 빙하가 남아 있는데 이 빙하와 만년설 등이 녹은 빙하수가 암반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양이 엄청나므로 실제로 지표면을 흐르는 지표수인 '강'보다는 암반조직에서 흐르는 '암반수'가 훨씬 많다. 남섬에서 상수도와 목축장의 관개용수의 원천은 바로 '빙하암반수'인 것이다.뉴질랜드 남섬의 물이 좋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며 남섬은 수도요금이 없다.
형성과 배경
뉴질랜드는 지금으로부터 약 2억년 전에 현재의 대부분 남반구에 분포 되어 있는 대륙의 모태가 되는 초대륙 '곤두와나(Gondwana)'(인도, 뉴기니아, 남극,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등이 한데 붙어있던 형태)의 지각변동과 이동에 의하여 8천5백만년 전에 분리하기 시작하여 2천7백만년 전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약 5백만년전 캄부리이기 이후 해수면과 지각이 융기, 침강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화산활동과 지진 등의 영향을 받음으로 인하여 바다 밑으로 두 번이나 잠겼다 올라온 땅이다.
그 결과 북섬은 화산지역이 대부분으로, 대형 산사태로 인한 구릉지방이 만들어 지고 아직도 간헐적으로 화산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남섬은 특히 약 200만년 전부터 1만 5천년 전 사이에 있었던 4번의 지구의 빙하기 중 가장 마지막 빙하운동의 영향으로 남위 40도 이하에 해당하는 남섬의 대부분은 빙하침식에 의한 잔재물의 결과 다양한 형태의 자연지형을 볼 수 있게 되었다.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달리면서 행정구역을 벗어나자마자 약 2시간 이상 펼쳐지는 '켄터베리 평야(Canterbury Plain)'도 바로 서쪽편(오른쪽 편)에 멀리 보이는 '서던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침식된 빙하의 퇴적물들이 쌍이면서 형성된 빙하의 '충적평야'이며, 계속 나타나는 호수들은 빙하의 압력으로 침식된 거대한 웅덩이 위의 빙하가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빙하기가 끝나고 결국 녹기 시작하여 물로 변해버린 빙하호수이고, 특히 남섬여행의 하일라이트인 '밀포드사운드'는 빙하운동이 서부해안을 침식하면서 생긴 엄청난 규모의 협곡으로서 거대한 빙하들이 하루 평균 약 32cm씩 바다 쪽으로 이동하면서 16km나 되는 거리의 산자락을 깍아 놓아 바닷물이 내륙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형성된 피요르드(Fiord)는 빙하운동의 결정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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