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것으로 많은 크리스천들 사이에 '꼭 봐야 할 영화'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수난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던 것보다는 훨씬 더 잔인하게 그려져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휘두르는 쇳조각 달린 채찍에 예수님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나 대못이 손에 박힐 때 피가 솟구쳐 오르는 장면에서는 관중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저 끔찍하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멜 깁슨은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관객들이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연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시몬처럼 예수의 육체적 고통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이사야 53:5)는 성경 구절을 관객의 머리 속에 단단히 주입시키고자 합니다. 즉, 예수께서 왜 죽으셨고,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를 영화 속에서 발견하고 십자가의 영적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이제 마지막 사순절 기간인 고난주간입니다. 멜깁슨이 원하는 것처럼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묘사 때문에 아연실색하든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에 자극을 받든 간에 끝까지 견디며 관람한 후 자리를 떠나면서 우리들도 바뀌게 되길 원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이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발견했습니다. 고난주간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절기로,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흔히 오늘 한국교회에는 사순절 문화가 없다고 합니다. 겨우 하는 것이 특별 새벽기도회와 총동원 전도계획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현장에 대한 고민이나 지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에 우리는 십자가 지신 예수를 생각하며 감격해하고 그 사실을 믿을 뿐,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에의 동참’이 없는 ‘고난에의 믿음’만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주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고난주간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방법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선 경건 훈련의 방법으로 금식을 권합니다. 금식은 성도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가장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방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금식은 가난한 사람이나 신비적이고 광신적인 신자들만 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금식하면 (1)육체적으로 배고픈 자의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2)영적인 변화를 체험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40일 금식을 두 번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3일 금식을 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도 금식하고 회개했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떡과 물을 마신 후 40일 동안 금식하며 호렙산 까지 걸어갔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40일 금식하셨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금식은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겸손의 태도인 것입니다. 적절한 금식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유익이 있습니다. 금식은 자기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면 인간의 본능적인 죄인 탐욕, 곧 남보다 더 잘 살고 싶고, 더 성공하고 싶고, 무엇이든지 더 잘하고 싶은 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좋은 옷 입고, 화장하는 것, 잘 먹고 즐기며, 화려한 사치품을 갖는 것 등 모두가 의미가 없고 시시해집니다. 이처럼 금식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놀라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왜 더욱 경건을 강조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이 더욱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위하여 살아가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건이라 함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큐티(Q.T)를 생활화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위해 금식은 꼭 필요합니다. 고난주간 하루 한 끼라도 금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무작정 금식하거나, 고통 받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단련하는 통로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하는 훈련으로서 고난을 이해하고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는 열 살이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으며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형은 가족을 부양하기 힘겨워 동생들을 증오했다고 합니다. 바하는 결혼한 지 1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했습니다. 그는 20명의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에 10명은 10살 이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정신박약아였습니다. 그는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역경을 딛고 일어서 끊임없이 불후의 영작을 남겼습니다. 그의 모든 악보 위에는 Soli Deo Gloria(하나님께만 영광)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교회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모두가 다 이 연단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세 번째, 절제의 훈련입니다. 왜, 절제를 강조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소비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비문화 속에서는 과소비가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소비를 통하여 남에게 인정받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비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필요보다는 욕망에 의한 소비를 하게 함으로써 생태계 파괴에도 결정적인 악영향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절제는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의 생활덕목이 돼야 합니다. 특히 기호식품(커피 탄산음료 등)과 육류 등의 음식을 비롯해서 혼인 오락 축제 등 웃고 즐기는 문화와 인터넷게임, 텔레비전 시청 등의 여러 방면에서 줄일 수 있는 것을 모두 줄여보는 절제생활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몸에 배어 있어서 갑자기 그만두거나 절제하는 일은 힘들고 불편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편하고 쉽게 생활하는 것은 환경을 보전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과소비를 통한 죄악이 결국은 우리를 쓰러뜨리고 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눔의 훈련입니다. 결국 경건과 절제의 훈련은 나눔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금식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과 이웃의 아픔 그리고 우리들의 죄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자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구체적 사랑의 나눔 운동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금식하고 절제하며 모은 헌금이나 물질을 어려운 이웃이나 시설에 전달함으로서 십자가 삶의 근본인 섬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삶은 섬김과 봉사입니다. 섬김은 나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남의 손을 씻다보면 내 손이 깨끗해지고, 남의 귀를 즐겁게 해주다보면 내 귀도 즐거워진다.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이 먼저 밝아지고, 남을 위해 기도하면 내 마음이 먼저 맑아진다.”는 이규경 님의 말처럼 사랑과 은혜와 베품은 나눌수록 남음이 되고, 욕심은 비울수록 채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비전가족 여러분 한번 큰소리로 따라해 보실래요? [움켜쥐면 고인물, 나눠주면 샘물] [있어서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있어도 주지 않는 것은 죄이고, 없어도 베푸는 것이 사랑입니다].
고난주간의 경건과 절제는 우리의 필요와 욕구는 잠시 멈추고, 십자가 앞으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고난주간 한 끼 금식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이웃의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비전 가족 여러분이 되시길 부탁드리며, 생활 속에서 다음 ‘녹색 십계명’을 실천해 보심으로 ‘경건과 절제’를 생활화하시길 바랍니다. 일. 일회용품을 쓰지 맙시다. 이. 이용합시다, 대중교통. 삼. 삼가합시다, 합성세제. 사. 사용합시다, 중고용품. 오. 오늘도 물, 전기를 아껴씁시다. 육. 육식을 줄이고, 음식을 절제합시다. 칠. 칠일째는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게 삽시다. 팔. 팔지 맙시다, 소비광고에 한눈을. 구. 구합시다, 작고, 단순하고, 불편한 것! 십.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이웃을 도웁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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