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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우리가 성경 지식을 늘리는데
급급하여 기도를 게을리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성경말씀에 대한 지식을 쌓느라
기도를 게을리 하는 모순에 빠져서는 안 된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깊은 성경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께 낮은 평가를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혼은 더러운데
육체만 깨끗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음속에 정욕이 가득하면서
겉모양만 경건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혼은 약해지는데
육신에 힘이 넘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면
물질적으로 부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인기를 누리다가
지옥에 가서 무시당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도하라!
기도하면 이런 모든 모순과 잘못이 고쳐질 것이다.
이 시대는 심지어 신앙 또한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 지지않고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왜곡된 평가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라.
하나님과 동행하면 천상(天上)의 평안을 맛볼 것이다.
- 레오나드 레이븐힐의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中 - /자료ⓒ창골산 봉서방
1).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기도.
2). 항의 기도.
3). 오만한 기도.
4). 자기 과시적인 기도.
5). 사기꾼의 기도.
6). 무속적인 기도.
7). 잘못된 예언 기도.
8). 공갈 협박 기도.
9). 청구서를 제출하지 말라.
10). 허식으로 가득한 기도
11).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는 목사가 있다.
12). 성도 개인에게 주신 기업을 교회의 기업이라고 말하지 말라.
13). 자기 암시.
14). 스스로 만든 기도 응답.
15). 자기가 하나님인 양 용서한다고 하는 기도.
16). 성도와 성도를 비교한 기도.
17). 동정심을 조장하는 기도.
18). 허영심을 조장하는 기도.
19). 자화 자찬하는 기도.
20). 은퇴 목사를 무시하는 기도.
21).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을 숨기려는 변명 기도,
22). 듣는 성도들에게 덕이 안되는 기도들.
23). 강단에서 이름을 부르고 감사의 내용을 읽어 가며 하는 기도.
24). 하나님을 가르치는 기도.
25). 억지 겸손.
26). 이상하고 독특한 목소리와 말투.
27). 기도 중에 화를 내고 탁자 치기 말라.
28). 불순종하는 기도.
29). 운명론적인 기도.
30). 공중 기도에 방언 기도 말라. /자료ⓒ창골산 봉서방
기독교 교회는 모이는 교회일 뿐만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의 모든 생활터전에서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아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데이비드 듀플레시스 박사는 성령 충만하지 않은 신앙이 '얼음 위의 진리' 라면 성령충만한 신앙은 '불 위의 진리' 라고 했습니다. 얼음 위의 진리는 냉랭하고 딱딱하여 아무 냄새도, 아무 영향력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 위의 진리는 마치 불고기가 좋은 냄새를 내듯이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천하에 퍼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교회생활의 성장 십계명은 10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영적인 것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라.
2.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라.
3. 교회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
4. 봉사를 생활화하라.
5.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의 조화를 이루라.
6. 물질을 심어라.
7. 새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 들이라.
8. 말을 조심하라.
9. 소그룹에 참여하라.
10. 교회 밖에서 더 열심히 믿어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행복한 교회생활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자.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로 인하여 감사하자. 우리를 교회의 지체로 불러주심을 감사하자.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올바로 섬기는 우리가 되도록, 한국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자.
교회성장연구소 「행복한 삶을 위한 77가지 이야기」중에서 /자료ⓒ창골산 봉서방
▶ 어진 사람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남들에게 이야기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만 들은 것을 이야기 한다.
▶ 귀로 무엇을 들을 것인가, 눈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는 자기 의지대로 하기 어렵다.
그러나 입은 의지대로 할 수 있다.
▶ 혀는 마음의 붓이다.
▶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 자기가 하는 말을 자신이 건너게 될 다리라고 생각하라. 그리하면 튼튼한 다리가 아니면
당신은 건너지 않을 것이다.
▶ 고약한 혀는 고약한 손보다 나쁘다
▶ 현명한 말은 현명한 행동보다 못하다
▶ ‘이를테면’하는 말을 듣거든, 그것은 예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 말은 약과 같은 것이다. 신중히 생각해서 말해야 한다.
▶ 한대 맞은 아픔은 언젠가는 없어지지만, 모욕 당한 말은 영원히 남는다.
▶ 급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급하게 잘못을 저지른다.
▶ 말이 당신의 입 안에서 돌고 있을 때 그 말은 당신의 노예이지만, 일단 밖으로 튀어
나왔을 때는 당신의 주인이 된다.
▶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남을 욕하는 것보다 낫다.
▶ 홑거짓말은 거짓말이고, 겹거짓말도 거짓말이며, 세겹의 거짓말은 정치이다.
▶ 지나친 질문은 하지 말라. 성가시게 물으면, 신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천국으로 오라.’
▶ 침묵도 하나의 대답이다.
▶ 침묵은 어진 사람을 더욱 어질게 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침묵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 어리석은 자가 어진 듯이 하기는 간단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된다.
▶ 어리석은 자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어리석은 자는 수다스럽다.
▶ 지껄이기를 잘하는 어리석은 자는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와 같고, 말없이
가만히 있는 어리석은 자는 고장나서 움직이지 않는 시계와 같다.
둘 중에 후자가 훨씬낫다.
▶ 영혼까지도 휴식이 필요하므로, 인간은 잠을 자는 것이다. 입에도 휴식을 주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출처 : 탈무드의 격언 中 발췌 )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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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죽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세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공동체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나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처와 은사를 가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자료ⓒ창골산 봉서방
우리는 ‘용서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전에 싫어했던 사람에 대해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을 과거의 사건에 옭아매어 놓게 됩니다.
지나간 일 때문에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한편, 우리는 ‘용서하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마음은 느긋하고 여유로워 집니다.
그리고 과거의 주술에서 해방되어 안락함과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얻게 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행위를 잘했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 주는 것도 아닙니다.
또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참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지나간 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더 이상 상대방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편안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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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살다보면 누군가에 대하여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이런 일도 용서하지 못하다니 난 정말 못됐어.’ 라든가
‘난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하고 자책하지 말아 주십시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런 자신을 우선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지금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시다.
우선은 자신을 용서하는 일,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자기수용’ 이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수용하고 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여유도 생깁니다.
-노구치 요시노리<거울의 법칙>-/자료ⓒ창골산 봉서방
신앙은 정신적 쾌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키고 지적 유희를 돕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영혼을 만지고 지나간’ 사실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큰 부담을 주는 장엄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면,
‘나는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니 특별하게 살아야 할 텐데’라는 특별한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불꽃처럼 살고 싶은 것은 왜소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에 아랑곳없이 안일하게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격 명령도 받았는데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싸움에 동참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장엄한 전쟁을 외면한 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면
나중에 하나님을 어떻게 보려고 합니까?
영적 전쟁을 싸우지 않는다면 적군의 포로가 되어 어둠과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군사로 사는 삶이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작은 수고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군사로 살지 않아서 받을 고통에 비하면 진실로 행복한 부르심입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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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보고
내적인 생명의 깊은 체험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괴테가 말한 것과 같이 "너무 숭고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거나 행동으로 체험할 수는 있다.
묵상과 기도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면
마음은 천상의 기쁨으로 흘러 넘친다.
슬픔과 고통의 세상에 감추어진 큰 기쁨의 보고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기쁨이다.
왜냐하면 기쁨을 경험한 사람조차 기쁨에 대해
정확하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셔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이
그것의 실재를 드러내 준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하나님의 임재
곤충들이 촉수를 가지고 주변의 정황을 느끼고
해로운 것인지 유익한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처럼,
영적인 사람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해서
위험하고 파괴적인 영향들을 피하고
충만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터툴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영혼이 제 모습을 회복하고
본래의 건전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영혼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실재들을 드러내 보이신다.
-선다싱-/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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