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양식

시대가 변했습니까? / 내 눈을 떠서

yigdal(米糠) 2019. 8. 5. 10:20

시대가 변했습니까?                   

 

글쓴이 강학종목사


백화점에 다니는 버릇 때문인지 요즘은 교회에서 고객 대접을 기대하는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풀어주는 설교보다 짧은 설교를 더 좋아하고, 은혜가 있는 예배보다 제시간에 끝나는

예배를 더 좋아하고, 신앙을 제대로 훈련시켜주는 교회보다 부담 주지 않는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교회 나가주고, 예배 드려주고, 예수 믿어주고, 헌금 드려주는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상태에서 여자가 임신을 하자, 목사가 주례를 거부한 사례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혼전 임신이 주례 거부 사유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라는 인식이 있느냐에 대한 얘기입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책벌이 존재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책벌을 말하면 다 웃을 것입니다.
차라리 신앙생활을 안 하고 말지, 누가 책벌까지 받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합니까?
이제는 교회에 와서 앉아주기만 하면 고마워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비단 신앙만이 아닙니다.
요즘은 단어 사용도 엉망이라는 느낌이 종종 듭니다.
사람들이 가장 자주 틀리는 단어가 ‘같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말에 ‘맛있는 것 같다’ ‘예쁜 것 같다’는 표현이 있습니까?
‘같다’는 추측이나 불확실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게 쓰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보면서는 ‘맛있게 먹는 것 같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먹었으면 ‘맛있다’라고 해야 합니다.
시간 약속을 한 상태에서 ‘늦을 것 같다’라고 하면, ‘늦을 수도 있지만 늦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라는 뜻입니다.
늦지 않을 가능성이 없으면 ‘늦을 것 같다’가 아니라 ‘늦는다’입니다.

전에 TV 리포터가 ‘다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을 ‘틀리다’라고 하는 것을 보고는 제가 타박했던 적이 있습니다.
“뭐야? 무슨 리포터가 저 모양이야?”
그랬더니 옆에서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만해요. 언어 현실이에요. 당신이 너무 민감한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언어는 변하게 마련입니다.
지난 1933년에 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도 계속 수정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적하는 용례도 세월이 지나면 전부 맞는 표현이 되어서 국어사전에 등재되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독불장군(獨不將軍)입니다.
독불장군은 글자 그대로하면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입니다.
즉 남의 동조 없이 혼자 나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지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잘못 쓰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단어의 뜻이 아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언어 현실은 그렇다 치고, 신앙 현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도 세월이 변해서 그런 것으로 알고 넘어가야 할까요?
“예전에는 하나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

하나님도 다 이해하신다.”라고 해야 합니까?
“예전에는 자기를 부인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는 죽도록 충성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 전부 웃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중에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이 시대에 안 맞으면 성경을 고쳐야 하고, 우리가 신앙 원칙에 안 맞으면 우리를 고쳐야 합니다.
성경을 고치든지, 우리를 고치든지 둘 중의 한쪽을 고치십시다.

아무것도 안 고치고 대충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성경 따로, 우리 따로 살아가는 것은 지금까지로 족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한 가지는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