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붙잡으라(3월31일)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2:1~5)
길을 걷다 보면 가끔씩 도로 한복판에서 말다툼을 하거나 심한 경우 몸싸움을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말리기도 하고 사태가 더 심각해지면 경찰이 출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토록 심각하게 다툰 이유가 별 것 아닌 경우 가 많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 양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서도 성도들 사이에 불화나 다툼이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도 가만히 보면 별 것 아닌 일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그만인데 그러지 못해서 서로 얼굴을 붉힙니다. 물론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것들에 에너지를 쏟다 보면, 정작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을 놓쳐 후회하는 일이 꼭 생깁니다.
사소한 것은 결국 비본질적이기 마련입니다. 바뀌어도 상관없고, 어떻게 되든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에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 거꾸로 일 때가 의외로 많습니다.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것은 양보하지 않으면서 결정적인 것, 본질적인 일은 별 생각 없이 양보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들이 발생합니다.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 본질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복음입니다. 십자가와 복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과도 양보나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와 복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면 타협하고 더 많이 양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복음에 있어서는 그 어떤 양보나 타협이 없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형제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울은 그들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복음을 위협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잠 25:26) 본질을 아는 사람들, 곧 진리의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흙탕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울이 진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우리 역시 사소한 것들 때문에 본질을 놓치거나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직도 비본질에 얽매여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오늘 하루 사소한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비본질적인 것들은 다 양보하고 십자가와 복음만 붙잡고 나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내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일에 정성과 마음을 들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의선 목사 (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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