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기도

46장 성령의 임재(겔47:1-5)

yigdal(米糠) 2018. 9. 17. 16:22

46장 성령의 임재(47:1-5)

 

기도에는 육으로 기도하는 것과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오래 기도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이유는 기도를 육적인 노력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 기도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파도를 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의 파도를 탑니다. 영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적인 기도는 사람의 의지와 뜻으로 구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영적인 기도는 성령의 주권을 따르기 때문에 기도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육적인 기도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힘이 들지만 영적인 기도는 기도를 멈추는 것이 힘이 듭니다. 육적인 기도는 30분을 버티기도 힘들지만 영적인 기도는 3시간을 하고도 멈추기가 어렵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자 동쪽 문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물을 건너라고 했습니다. 물이 발목까지 올라왔습니다. 그가 조금 더 가서 물을 건너니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습니다. 조금더 가서 물을 건너라고 했습니다. 물이 허리까지 올라왔습니다. 다시 조금 더 가서 보니 물이 강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 헤엄을 치며 건너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실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성전에서 일어날 일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 성령의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행전 1장에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역사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성령의 역사는 점점 그 수준이 깊어집니다. 처음에 발목까지 차오른 것은 성령에 대한 체험 수준을 말합니다. 무릎까지 차오르고 또 다시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는 것은 각자가 경험하는 영적 수준을 말합니다. 성령을 경험하더라도 그 깊이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내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40:1-4).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환상은 현실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식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여 주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미래는 나의 생각이나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는 것만이 사실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지식으로 살지 않고 영적인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불이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세상 소식을 듣는 것보다 주님으로 부터 듣는 말씀과 환상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혼자 길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와야 울음을 그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달콤한 이야기를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엄마의 소리를 들어야 진정이 됩니다.

우리 안의 영이 길가의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안의 영이 울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까요? 아버지 하나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의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을고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47:3-4).

처음에는 발목에, 다음에는 무릎에, 다음에는 허리에, 마지막은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물이 차고 넘쳤습니다. 기도하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체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은 만남이 필요합니다. 발목을 담그는 영적인 수준에 있으면서 영적인 세계를 전부 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내 몸이 전부 물 위에 떠오른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영적인 자기 싸움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1시간을 기도하는 것과 2시간을 기도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저 30분 정도 기도하고 아무 감동이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루 3시간씩 기도하면 성령의 충만한 바다에 들어갈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절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에스겔은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천사의 말씀에 따라 조금씩 깊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도 자신의 영적인 수준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깊어지는 신앙의 비밀이 오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있고, 뒤쳐지다 결국에는 발목으로 후퇴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발목을 지나가야 무릎이 차고 무릎을 지나갸야 허리에 물이 차는 더 깊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날마다 자신을 향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더 깊은 기도는 방법이 다릅니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47:5).

발목이나 무릎, 허리까지 물이 찼을 때는 조금 힘이 들어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물처럼 불어나면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헤엄을 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육적인 믿음입니다. 내가 걸어가는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더 깊어지면 영적인 믿음이 됩니다. 이제는 헤엄을 쳐야 합니다. 내가 걸을 때는 땅을 딛고 가기 때문에 자신이 단단히 서야 합니다. 이러한 육적인 신앙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헤엄을 쳐야 할 대는 몸이 물에 떠야 합니다. 땅에서 발을 떼고 물에 의지해야 합니다. 물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수영을 해 보면 알겠지만, 힘을 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우리 몸이 물에 뜹니다. 영적인 믿음이란 이와 같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강물에서는 걸을 수가 없습니다. 헤엄을 쳐야 합니다.

영적인 믿음의 상태에서는 더 이상 육적인 방법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체험을 위한 첫 번째 깨달음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발목에서 허리까지 물이 찼을 때는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수준을 발견하면 스스로 절망합니다. 육적인 노력으로 기도 생활을 이끌어 가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강물에서 걸으려고 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육적인 노력을 내려놓고 성령의 강물에서는 헤엄을 쳐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하시는 세계입니다.

 

(오늘의 기도)

마음이 어둡고 답답한 날에도 지키시는 주님, 저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제 눈을 밝히셔서 어떤 마음 상태에서도 언약을 따라 기도의 자리까지 부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게 하시어 주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제 심장이 주님만을 위해 뛰게 하셔서 기쁨으로 찬송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